ART TOUR · FOUNDATION
TIME MATERIAL : Performing Museology
MeeKyoung Shin
신미경
space*c
코리아나미술관과 화장박물관이 공존하는 스페이스 씨(space*c)의 정체성과 특수성 살려 –
‘시간’과 ‘물질’은 신미경의 작업과 뮤지엄을 관통하는 키워드
신미경,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 2023 코리아나미술관 전시전경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코리아나화장품의 창업자 송파 유상옥 회장이 지난 50여 년간 애정을 가지고 수집한 유물과 미술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2003년 서울 신사동에 스페이스 씨를 설립했다. 고 정기용 건축가(1945~2011)가 설계한 스페이스 씨 건물에는 설립 취지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따라 한국 화장문화의 역사와 유물을 다루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이 5-6층에, ‘신체’, ‘여성’, ‘아름다움’ 등을 주제로 동시대 미술을 선보이는 코리아나미술관이 지하 1-2층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한 건물에 공존하고 있는 스페이스 씨의 20주년을 기념하며, 그 특수성을 살려 기획된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과 고미술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동양-서양, 고전-현대를 교차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이는 고전의 번역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고자 하는 작가 신미경의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전시 제목에 쓰인 ‘시간’과 ‘물질’은 신미경의 작업과 뮤지엄(museum)을 관통하는 주요 개념으로, 전시에서 뮤지엄 공간은 작품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물질적 실체이자 다차원의 시간과 물질이 공존하는 다층적 구조로 작동한다.
신미경, <풍화 프로젝트>, 2023 1점/ 비누, 65(h) x 34 x 24cm 코리아나미술관 중정 설치전경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단독 작가로는 국내 최초로 박물관/미술관을 통합,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한 실험적 전시
신미경, <풍화 프로젝트: 레진>, 2023 총 12점/ 레진에 채색, 가변크기 코리아나미술관 전시전경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1996년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British Museum)에 처음 방문하여 그리스 고전 조각상을 보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번역 시리즈>를 시작으로 신미경은 지난 30년 가까이 서양의 고전 조각상이나 동양의 도자기 등 문화적 유산을 ‘비누’라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재료를 통해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쉽게 마모되고, 녹아 사라지는 재료인 비누는 작가가 탐구하는 시간성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로 오랜 시간 활용되어 왔다. 어떤 사물의 시간성과 기능성이 정지된 채 뮤지올로지(museology) 안에서 유물이 되는 과정은 비누의 본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 작품으로서 권위를 획득하고, 전시되는 신미경의 작품과 맞닿아있다.
압축된 시간과 물질, 향이 어우러지는 미술관: 신미경의 대형 회화조각 등 신작 다수 공개
미술관의 첫 번째 전시실에 전시된 신작 <라지 페인팅 시리즈>(2023)는 조각가 신미경이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페인팅 시리즈>의 확장판으로, 회화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제작방식과 그 물질성은 조각에 가깝다. 한마디로 ‘회화처럼 보이는 조각’이라 할 수 있다.
캔버스로 치면 150호 정도되는 대형 철제 틀을 만들어 각 작품당 0.1톤이 넘는 비누를 녹여 색과 향을 더하고, 틀 안에 부어 굳히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표면을 다듬어 토치의 불로 색을 조정하는 등 밀도 높은 작업 과정을 통해 5점의 <라지 페인팅 시리즈>를 완성했다. 작품 하나당 200kg가 넘는 육중한 무게인데, 그 안에는 작가의 노동과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마다 다른 표면의 질감과 물질성을 느낄 수 있으며, 전시실을 가득 채운 작업의 비누향은 관람객의 후각을 자극한다.
마치 유럽의 한 뮤지엄 전시실에 온 것 같은 분위기의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코리아나미술관의 소장품에 영향을 받아 제작한 신미경의 신작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2023)를 만나볼 수 있다.
신미경,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 1998 비누, 178(h) x 65 x 41cm 코리아나미술관 전시전경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신미경,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 1998 비누, 178(h) x 65 x 41cm 코리아나미술관 전시전경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현대 미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박물관: 뮤지엄과 작가가 함께 만들어 낸 서사와 감각
전시는 5-6층에 위치한 화장박물관의 상설전시실로 이어진다. 5층 박물관 전시실 중앙에는 빛이 나오는 대형 좌대 위, 색색의 도자기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페르시안 유리공예품 같은 모습을 띠지만, 사실은 투명비누로 도자기를 캐스팅해 속을 파내고, 최소한의 형태만을 남겨 투명함을 강조한 신미경의 <고스트 시리즈>(2007~2013)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오브제의 역사적 맥락과 정보는 소멸되고,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오가는 비누의 속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한편,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용된 동경(청동거울)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장에는 신미경의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2018) 작품들이 함께 전시된다. 비누로 만든 도자기에 은박, 동박을 입혀 마치 몇 백 년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오래된 유물의 모습을 재현한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는 실제 유물인 동경과 서로를 비추듯 여러 층위의 시간과 물질을 교차시킨다.
6층 박물관 전시실에는 신미경의 지난 <풍화 프로젝트>와 <화장실 프로젝트>를 통해 변형된 모습의 인물상이나 불상 등의 조각을 다시 브론즈로 캐스팅해 번역한 신작이 선보여진다. 여기서 조각상들은 비누가 지니는 가변성은 사라진 채 각기 다른 차원의 시간성이 박제되듯 정지된 모습인데, 브론즈로는 얻어낼 수 없는 형태의 소멸과 질료의 흔적이 더해져 관람자로 하여금 그 작품의 시간의 흔적을 역추적하게 하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22-2023 총 6점/ 비누, 가변크기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전시전경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최근 5개월 간, 시내 한 백화점의 화장실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변형된 모습의 화장실 프로젝트 조각상 6점 또한 그 본래의 쓰임이 멈춰진 채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에 설치되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조각된 여인조각상의 머리는 사람들의 쓰임에 의해 매끈한 타원형의 형태로 변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신미경의 <화장실 프로젝트(Toilet Project)>(2004~)에 대해 “정교한 비누 조각상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구(球)체로 바뀌는 과정은 모더니즘 예술이 어떻게 뮤지엄을 차용해 번역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평한 바 있다.
“작품을 만져보세요. 닳아져도 좋습니다.”: <화장실 프로젝트>의 짜릿한 경험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23 총 4점/ 비누 코리아나미술관 화장실 설치전경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이번 전시기간 새롭게 진행되는 <화장실 프로젝트>(2023) 비누 조각상 4점은 지하 1층과 지상 5층의 남녀화장실에 각각 설치되어 전시를 찾는 이들에게 ‘작품을 손으로 만지고, 심지어 변형시키는’ 짜릿한 촉각적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전시장 안에서는 만질 수 없는 신미경의 비누조각을 유일하게 마음껏 만져보며 비누의 본래 기능으로 사용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전시기간 관람객들에 의해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마모되어 가는 “되어감”의 과정 자체가 예술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미학자이자 미술평론가 강수미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는 “스페이스 씨가 20년이라는 이정표를 통과해 더욱 앞으로 나아갈 이 시점에서 신미경을 20주년 기획전의 단독 작가로 세워 미술관/박물관이 작가와 협업 및 상호 공존함으로써 각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전시”라고 평했다.
신작의 작업과정과 설치 과정 등이 신미경 작가의 인터뷰와 함께 담긴 영상이 전시장 내 상영된다. 3월 2일(목) 오후 6시에 개막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며, 3월 11일(토) 오후 3시부터는 미학자 강수미와 신미경 작가가 함께하는 아티스트 토크가 개최된다.
자세한 내용은 스페이스 씨 홈페이지(www.spacec.c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업중인 신미경 작가의 모습 ⓒ사진_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촬영_아인아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국제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각가 신미경(b.1967)은 고대 유물 등 다양한 문화적 생산물을 일상적인 재료이자 쉽게 녹아 사라지는 속성을 지닌 비누를 이용해 번역하는 작업을 선보이며, ‘시간성’을 주요한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작가의 재해석을 통해 재현된 작품들은 전시 장소와 감상자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층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신미경은 <번역 시리즈>, <고스트 시리즈>, <화장실 프로젝트>,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폐허> 등 다양한 작품군을 선보여왔으며, 최근에는 비누 외에도 세라믹, 제스모나이트, 브론즈와 레진 등의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거석》(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 2022), 《앱스트랙트 매터스》(씨알콜렉티브, 2021), 《날씨》(바라캇 런던, 2019), 《오래된 미래》(우양미술관, 2018),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아르코미술관, 2018), 《신미경 개인전》 (스페이스K, 2016), 《진기한 장식장》(학고재 상하이, 2016), 《올해의 작가상 2013》(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3), 《트렌스레이션》(런던 헌치 오브 베니슨 갤러리, 2011), 《트렌스레이션》(국제갤러리, 2009), 《퍼포먼스&쇼》(브리티시 뮤지엄, 2004)가 있다. 또한, 광주 아시아문화전당(2021), 서울대학교 미술관(2021), 대전시립미술관(2021), 여수국제미술제(2020),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2020), 스톡홀름 국립미술관(2020), 경기도미술관(2019),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2017), 사치갤러리(2017)등 국내외 유수 기관의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올해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초대형 비누 조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신미경은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런던 슬레이드 미술대학과 영국 왕립예술학교 졸업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미국 휴스턴 미술관, 영국예술위원회, 영국 브리스톨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03년 개관하여 올해 20주년을 맞은 스페이스 씨는 ㈜코리아나화장품이 설립한 복합예술공간으로, 문화 경영 이념인 ‘아름다운 기업, 코리아나Coreana’를 추구하며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Culture를 창조하고, 함께하는 문화 공동체Community를 구축하고자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또한, 이곳은 ㈜코리아나화장품의 창업자인 송파 유상옥(松坡 兪相玉) 회장의 문화 경영에 대한 신념과 반세기 동안 수집한 고미술품과 현대미술 작품의 접목으로 이룬 결실이다.
스페이스 씨는 한국 화장문화의 역사와 전통 화장유물을 소개하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과 현대미술 국제기획전 및 소장품 기획전을 80회 이상 선보여온 코리아나미술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장박물관은 한국의 화장문화와 함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프랑스, 영국, 일본, 중국, 미국, 필리핀 등에서 소장품 기획 전시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앞으로 호주와 캐나다에서 우수한 우리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미술관은 매해 다양한 내·외부 기획전을 개최하여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하는 등 동시대 미술의 주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더하여 코리아나미술관과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아름다움(美)’에 대한 연구를 함께 지속해 오고 있으며, 특히 소장품으로 기획한 《자인姿人》 전시를 통해 다양한 ‘동서양의 미인도’를 국내 여러 지역에 선보이며 문화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스페이스 씨의 설립자이신 유상옥 회장은 꾸준한 유물 기증과 박물관·미술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옥관문화훈장에 이어 지난해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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