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COLUMN · TREND
세기의 거장들이 사랑한 페인팅 재료
'유화(Oil paint)'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다 보면, 마음에 드는 작품에 눈길이 갑니다. 작가의 의도 하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도 궁금하지만, 다채로운 색채와 특이한 질감을 보면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답니다.
‘이 작품은 어떤 재료를 이용해서 그린 걸까?’ 라는 생각에 작품 옆 *캡션을 봤을 때, 미술에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낯선 단어들이 한가득입니다. ‘Oil on canvas’, ‘Acrylic on canvas’ 등 알지 못하는 미술 재료들은 작품과 다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데요.
*캡션(caption) : 작품에 대한 짧은 해설문
작가들이 사용하는 페인팅 재료는 각각의 특색과 사용법이 다르기에, 자신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작품에 가장 적합한 재료를 선택하게 됩니다. 작가들은 본인의 화풍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여 그림을 그려내기에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는 재료의 이해도 매우 중요합니다. 미술 재료에 대해 조금만 알게 되면, 미술을 이해하는 폭은 훨씬 넓어진답니다. 이런 수많은 재료들 중, ‘유화 물감’은 고전 유럽 대가들부터 현대의 작가들까지 모두가 가장 사랑하는 재료입니다.
사실 유화가 탄생하기 전에는 주로 수용성 재료로 그려진 작품이 많았는데요. 수용성 재료로 그려진 작품은 건조가 빨라 붓 자국이 보이거나, 부드러운 질감 등의 표현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비해 유화는 ‘물’ 대신 ‘기름’을 활용한 재료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작업을 지속해도 문제가 없었기에 수용성 재료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 건조에는 최소 한 달이 필요하기에 새로운 색을 덧입혀가며 작업을 한다면, 몇 년씩 작업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지오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부인의 초상, Oil on panel,1434,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초기 유화 기법을 완성한 선구자인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b.1390-1441)의 작품을 보면 마룻 바닥의 질감과 강아지의 털, 인물의 표정과 옷 주름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지오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부인의 초상(The Arnolfini Portrait)’작품은 수용성 재료로 대표해 사용되던 *템페라 기법과 유화 기법이 혼용되어 사용된 과도기적인 작품인데요.
유화의 장점을 살려 수용성 물감보다 천천히 마르고, 발색이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는 유화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그라데이션 기법(gradation)’이죠.
기존에 주로 사용된 템페라 기법과 달리, 작가가 유화물감을 이용하여 그린 의상의 주름 부분 붓 자국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이 이루어져 천의 매끄러운 질감을 세심하게 표현할 수 있었음 알 수 있답니다. 시간의 제약 없이 섬세하고 정교한 묘사를 할 수 있었던 작가들에게는 작품에 깊이감을 더하기엔 최고의 재료였기에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템페라 기법(tempera) : 유채화(유화) 이외의 주로 계란을 사용한 종래의 화법은 모두 템페라라고 하였다. 템페라화는 빨리 마르고 튼튼하며 내구성이 풍부한 화구층을 만들며, 유화구와 달라서 건조하면 색조가 더 밝아진다.
출처: 미술대사전(용어편), 제공: 한국사전연구사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Oil on canvas, 73.7 x 92.1 cm, 1889, MOMA 소장
얀 반 에이크는 부드러운 옷의 질감에 유화를 적극 활용했다면,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붓터치를 인상적으로 표현해 유화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작품은 소용돌이 치는 별빛 아래의 생레미 도시 풍경을 그만의 감성으로 잘 표현해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죠. 고흐 특유의 마티에르(질감)가 잘 느껴지는 이 작품은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이 마치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고, 그 위로는 달과 별,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떠있습니다.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 나무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합니다.
당시 고갱과 다투고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 레미의 요양원에서 지내며 느낀 좌절감과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한 그는 유화를 적극 활용합니다. 보다 강렬하고 선명한 색감과 회오리치듯 꿈틀거리는 붓터치로 당시 느낀 격렬한 감정을 표현했고,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죠. 이때 힘있으면서도 살아있는 듯한 붓터치, 기름에 의해 반짝이고 선명한 유화의 느낌은 보다 큰 역할을 합니다.
‘유화’가 ‘돼지 방광’에?
인상주의의 획기적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유화 물감은 1841년 출시된 물감 튜브로 인해 절정을 이룹니다. 당시 기존의 유화 물감은 실내의 화실에서 가루 안료를 기름과 혼합해 만들어 돼지의 방광에 일시적으로 저장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보관 형태에서는 한 번 개봉하면 다시 닫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죠. 이로 인해 야외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워 작가들은 화실 안에서만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잠재운 건 미국의 작가 존 고프 랜드(John Goffe Rand)의 주석으로 만든 ‘튜브’에서 비롯된 획기적인 아이디어 덕분이죠. 이 혁명적인 발명으로 인해 번거로웠던 유화 물감은 공장에서 튜브에 넣어 대량 제조해 판매되었고, 휴대가 용이해진 물감 튜브로 인해 작가들은 야외 스케치가 가능해졌습니다.
돼지 방광 물감(좌)과 새로 발명된 물감 튜브(우)
이로 인해 1874년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의 인상주의 작가들에게는 당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기반한 고전미술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물감 튜브를 가지고 야외로 나간 인상주의 작가들은 ‘빛’에 따라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에 집중했고, 같은 장소더라도 그 날의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다채로운 색감을 생생히 담아냈습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해돋이(Sunrise (Marine)), Oil on canvas, 50.2 x 61cm, 1872 or 1873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클로드 모네의 ‘해돋이(Sunrise (Marine))’작품은 아침 안개가 깔린 프랑스 북부 르아브르 항구의 풍경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해를 인상적으로 그려냈죠. 해당 작품은 바다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의 주황빛과 새벽녘 잔잔한 안개를 표현한 푸른빛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모네의 해돋이 시리즈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으로 인정받지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모든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거부한 인상주의 작가들이 눈에 보인 그대로 담아낸 풍경은 충격 그 자체였답니다. 당시 엄격한 형식과 균형, 구도 등을 중요하게 여기던 신고전주의, 생활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유행하던 서양 예술계에서는 신랄한 비판을 받습니다. 고전적인 틀에 국한된 미술계에서 보여진 그의 작품은 단지 붓질 몇 번 슥슥 그려내 성의 없는, 완성되지 않은 작품일 뿐이었죠.
빛이라는 존재에 더 가까이 접근했고, 그들이 발견한 다양한 빛과 날씨의 변화가 어우러진 환경은 보다 자연스러웠고, 전통적인 회화의 틀을 산산조각 낸 것이죠.
이처럼 수많은 비판을 뒤로하고 그 대상의 느낌, 인상을 표현하려고 했던 모네의 ‘해돋이’는 현재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 서정적인 분위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클로드 모네, The Water-Lily Pond, Oil on canvas, 88.3 x 93.1cm, 1899
“튜브에 담긴 페인트는 휴대가 간편하여 자연과 자연만으로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튜브에 색이 없다면 세잔도, 모네도, 피사로도, 인상파도 없을 것입니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르누아르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를 인용하여 유화의 휴대가 가능한 ‘튜브’의 발명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했죠. 이처럼 미술의 역사를 뒤바꾼 ‘유화’의 ‘물감 튜브’ 혁명은 미술 역사의 한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답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달라 보이는 페인팅 재료의 세계는 보다 넓고 깊습니다. 이번 기회에 수많은 작가들이 사랑한 페인팅 재료인 ‘유화’가 함께 하게 된 계기를 알아가며, 미술에 대해 색다른 재미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ARTiPIO Edito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