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TOUR · GALLERY
인식의 저편
WANG shuye
왕쉬예
Hakgojae Gallery
학고재는 9월 20일(수)부터 10월 28일(토)까지 학고재 본관에서 왕쉬예(王舒野, 男, 1963-) 개인전 《인식의 저편》을 개최한다.
왕쉬예는 중국 헤이룽장성 출신으로 1989년 중국 공예 미술학원(現 칭화미술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부터 일본에 정착했으며, 현재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인정받고 있는 작가이다.
왕쉬예, 시공나체・즉(165), 2023, 캔버스에 유채, 130.3×193.9cm
옛날 중국 미학에 무현(無絃)이라는 개념이 있다. 줄이 없는 거문고를 뜻한다.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 음악의 경지를 우리는 표현해낼 길이 없다. 줄이 있는 거문고는 아무리 잘 탄다고 하여도 귀를 만족시킬 뿐, 지극한 경지의 마음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손이 아닌, 마음으로 타고 마음으로 희열을 맛본 것이다.
중국 회화미학에 무가회(無可繪)라는 개념이 있다. 그릴 수 없는 경지를 뜻한다. 아무리 정밀하게 그려도 이는 자연주의에 귀속될 뿐이고, 아무리 시적 정취를 불어넣어도 의경(意境)은 쉽사리 태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순자(荀子, c. 298B.C.-238B.C.)는 “군자는 학문을 온전하고 순수하게 하지 않으면 족히 아름다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君子知夫不全不粹之不足以爲美也).”라고 말한 것이다. 그릴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중국 회화미학의 영원한 과제였다
23.09.20 – 10.28, 왕쉬예 《인식의 저편》 전시전경, 이미지 제공: 학고재 갤러리
현대 중국회화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로 양분되어 발전했다. 사실주의는 삶과 생명을 이야기했으며, 표현주의는 심상을 나타냈다. 중국의 동시대 회화는 형식주의 미학도 받아들인 바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을 쉼 없이 추구해왔다. 그런데 그 어떠한 영역에 귀속되지 않으면서 무가회의 회화에 도전해왔던 화가가 바로 왕쉬예이다.
왕쉬예, 압구정의 시공나체즉, 2023, 캔버스에 유채, 181.8×227
왕쉬예의 회화는 사실주의도 아니고 표현주의도 아니다. 근본적이면서도 철학적 전제를 상정하여 사물(존재와 관계)을 매우 주의 깊게 들여다보다 그림으로 표상하는 철학적 회화이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 왕쉬예의 회화세계의 특성을 표현주의적 몽환주의(expressive illusionism)라고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왕쉬예는 근본적 철학의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며 알게 되는 모든 감각, 즉 오온(五蘊)이라 부르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인식의 고유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의 능력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재현능력이다. 왕쉬예는 사물의 본질을 그린다. 곧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사물의 본질이 자리하는 지점을 사유로써 그리려는 것이다. 이를 작가는 “사물에 즉(卽)한다.”라고 발언한다. 왕쉬예는 거의 모든 작품에 <시공나체ㆍ즉(時空裸體ㆍ卽)>이라는 제목을 수여한다. 시공간의 본질을 회화세계로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것은 무가회의 회화를 동시대적 회화언어로 추구해왔던 장기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23.09.20 – 10.28, 왕쉬예 《인식의 저편》 전시전경, 이미지 제공: 학고재 갤러리
현재 세계 회화는 삶과 정치의 의미를 드러내는 사실주의 계열의 회화와 모더니즘을 재구성한 리모더니즘 회화로 양분되고 있다. 중국 현대회화는 1950년대 출생의 냉소적 사실주의 회화 이후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왕쉬예의 철학적이고 사유적이면서 회화적 깊이를 추구하는 근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 Hakgojae Gallery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