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두루미
GREGOR HILDEBRANDT
그레고어 힐데브란트
Perrotin Seoul
페로탕 서울은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의 개인전 《스쳐가는 두루미》를 개최한다. 2016년 페로탕 서울에서 선보인 한국 첫 개인전 이후 8년 만에 마련한 이번 전시에서는 카세트테이프와 같은 아날로그 음악 저장 매체를 이용한 그의 대표적인 연작과 더불어, 다채로운 색감이 돋보이는 바이닐(LP판) 기둥 조각을 포함한 작가의 최근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음악을 중심으로, 문학과 영화 등 다양한 문화적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발전해 온 그레고어의 작품들은 그 재료의 아날로그적 특성을 통해 우리의 기억과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며, 새로운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View Gregor Hildebrandt’s solo exhibition Kraniche Ziehen Vorüber (Cranes Passing By) at Perrotin Seoul, 2024 Photo: Hwang Jung Woo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매일 아침, 그레고어 힐데브란트는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집 침실 천장에 그려진 두루미를 맞이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두루미는 결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들의 비행은 여름 서식지에서 겨울 서식지로 이동하고 다시 돌아오는 경로를 따르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1957년에 개봉한 러시아 감독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영화 에서 차용한 것인데, 이 영화는 사랑에 빠진 젊은 커플이 이른 아침 모스크바의 황량한 거리에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두루미 떼를 보려고 잠시 멈춰 선 두 사람은 때마침 지나가는 청소차가 흩뿌리는 물에 놀라고 만다.
View Gregor Hildebrandt’s solo exhibition Kraniche Ziehen Vorüber (Cranes Passing By) at Perrotin Seoul, 2024 Photo: Hwang Jung Woo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하지만 이 연인의 기운은 꺾이지 않는다. 그레고어 힐데브란트는 사랑에 빠진 연인이다. 그는 삶과 예술, 영화, 음악을 사랑하며, 예술을 통해 이러한 사랑을 세상과 아낌없이 나눈다. 음악이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테이프, 레코드와 같은 음향 매체를 작품 창작에 활용할 뿐 아니라 템포, 리듬, 강조, 멈춤, 반복, 운율을 아우르는 음악의 모든 영역을 활용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멜로디는 수백만 번에 걸쳐 되풀이되고, 기억되지만 온전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음악적 재능을 갖춘 이들을 후원하며, 직접 만든 레이블을 통해 엄선된 음악가들의 바이닐 앨범을 정성스럽게 제작해 발매하기도 한다.
View Gregor Hildebrandt’s solo exhibition Kraniche Ziehen Vorüber (Cranes Passing By) at Perrotin Seoul, 2024 Photo: Hwang Jung Woo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음악은 시간에 따라 전개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그림과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청중은 귀를 기울이고 그 전개를 면밀히 따라가야만 한다. 여기에는 되돌릴 수 없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만, 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 미술 작품 역시 한 번 보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보는 사람의 눈에 온전히 드러나며, 관람의 선형성은 각 관람자의 시선에 달렸다. 따라서 회화의 내러티브는 개별적으로 전개되는 셈이다.
다채로운 색상의 바이닐(LP판)을 그릇처럼 쌓아 올린 기둥 작품들은 현대 조각의 위대한 고전인 콘스탄틴 브랑쿠시가 만들었던 에 경의를 표한다. 바이닐의 색상은 작가 파트너의 어머니가 입고 있던 스웨터의 줄무늬 패턴을 모방함으로써 사적인, 거의 내밀한 모티프를 차용한다.
View Gregor Hildebrandt’s solo exhibition Kraniche Ziehen Vorüber (Cranes Passing By) at Perrotin Seoul, 2024 Photo: Hwang Jung Woo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한때는 디지털 파일 형태이던 음악이 자유로운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그 형체를 잃어버리고 있는 이 시대에, 바이닐이나 비디오, 카세트테이프는 구식 매체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작품에서 추상적 음악이 실체를 얻고 형체를 유지하며 음악 작품과 연주자, 나아가 그와 관련된 이야기 및 신화와 직접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날로그 매체의 사용 때문이다.
Installation view Alex Prager: Western Mechanics Lehmann Maupin, Seoul May 9 – June 22, 2024 Courtesy Alex Prager Studio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이 재료들은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에 해당하고, 음악적 진동의 흔적이지만, 아무런 소리를 전달하지 않기에, 관람객의 상상력과 주관적 연상을 위한 공간을 열어내며, 이를 통해 일종의 내적 경청을 위한 울림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의 작품 제작 과정은 실제로 아날로그 필름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가지 이미지, 즉 포지티브와 네거티브를 생성한다. 캔버스에 부착된 카세트나 비디오(VHS)의 자기테이프 위에는 아크릴 물감으로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을 연상케 하는 제스처의 흔적이 덧붙여진다.
Gregor Hildebrandt, Kehren die Kraniche wieder zu dir (Do the Cranes Return to You Again), 2024, Audio cassette tape, acrylic on canvas, 147 × 117 cm. Photo: Roman März.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Gregor Hildebrandt, Und suchen zu deinen Ufern (And Do Seek Back to Your Shores), 2024, Magnetic audiotape coating, adhesive tape, acrylic on canvas, 147 × 117 cm. Photo: Roman März.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그 뒤, 테이프를 다시 떼어내면 캔버스를 어떻게 준비해 두었는지에 따라 테이프의 자기 층이 캔버스에 달라붙거나, 제거된다. 떼어낸 테이프는 첫 번째 그림에 대한 일종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형성하며, 두 번째 캔버스에 부착되면서 첫 번째 그림과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룬다.
동일한 음악과 기호를 담고 있는 한 쌍의 캔버스는 마치 흐릿한 거울상이나 흐릿하게 기억되는 꿈의 잔상처럼 뒤집혀 있다.
Gregor Hildebrandt, Donna, 2024, Ink jet print, plastic cases, inlays in wooden case, 159.5 × 111.5 × 9 cm. Photo: Roman März.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이와 같은 상호작용은 카세트테이프 선반으로 구성된 두 점의 신작이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이 작품들은 테이프에 삽입된 라벨 종이로 구성되어 있다. <Donna> (2024)는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2010년 영화 <블랙 스완>에서 맡은 역할을 위해 분장한 모습을 묘사한다.
이 영화는 차이콥스키의 발레 작품 <백조의 호수>에서 서로 대립하는 흑조와 백조 역할을 차지하려 자기 파괴적 투쟁에 임하는 야심 찬 무용수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예술적 완벽함과 자기 파괴를 다루는 대목에 이르면서, 환각적 에피소드를 통해 극적으로 고조된다. 여배우의 초상을 담은 이 잉크젯 프린트 작품에는 마치 인물의 눈물처럼 보이도록 작가가 찢어 둔 구멍이 있는데, 이를 통해 카세트 라벨에 적힌 원래의 제목들이 드러난다.
특히 팝 디바 마돈나의 이름이 두드러지면서, 작가는 강박적인 예술가에 대한 묘사를 강화하고 그 정점을 추출하며, 또 다른 층위의 대중 문화적 레퍼런스를 덧붙이고 있다.
Gregor Hildebrandt, Umatmen erwünschte Lüfte dir die beruhigte Flut (Breathe in the Desired Air on the Calm Tide), 2024, Inlays in plastic cases, wooden case, 213 × 197.5 × 9 cm. Photo: Roman März.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Umatmen erwünschte Lüfte dir die beruhigte Flut > (2024, 본 텍스트의 목적을 위해 어색하지만 그럴싸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잔잔한 조류에서 갈망하던 공기를 마시다)은 1801년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자연의 신성과 고대 그리스의 영광에 헌정한 송가 <Der Archipelagus>의 한 행으로, 번역이 거의 불가능한 문장이다.
이 작품은 힐데브란트의 출생지인 오늘날의 바트 홈부르크에서 쓰였고, 떠난 곳으로부터 돌아오는 두루미를 모티프로 시작된다. 이 행을 제목으로 삼은 힐데브란트의 작품은 스웨덴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에서 영감을 받아 서로 대립하는 백조와 흑조를 주제로, 검은 배경에 있는 백조와 흰 배경에 있는 검은 백조의 부리와 날개 끝이 맞닿은 모습을 그린다. 클린트에게 백조는 선과 악, 낮과 밤, 남성과 여성 등의 이분법으로 인해 극도로 양극화된 세상에 대한 극복을 상징했다.
View Gregor Hildebrandt’s solo exhibition Kraniche Ziehen Vorüber (Cranes Passing By) at Perrotin Seoul, 2024 Photo: Hwang Jung Woo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20세기 초, 클린트는 수년간 이어진 창조적 시기를 경험했는데, 이 시기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의 손이 보다 고차원적인 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우주적 통합의 세계에 대한 숨겨진 관점을 드러냈다.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의 그림은 힐마 아프 클린트 작품의 모티프를 뒤집어 백조를 흑조로, 흑조를 백조로 그렸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 변화는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에 거의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힐마 아프 클린트 작품의 요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레고어가 우주적 통합을 시적으로 구체화했다는 사실에 모티프 상의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Donna>의 경우에서와 같이 카세트테이프 케이스 안에 있던 속지 위에 백조와 흑조를 묘사하는 종이를 끼운것이 아니라, 흑백의 속지를 직접 잘라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카세트 라벨의 정보는 언뜻 보기에 부분적으로만 드러나며 마치 제목과 아티스트를 임의로 배열한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감정적 혼란과 꿈의 이미지, 불가능한 희망, 기억과 환상으로 가득한 일종의 메타(meta)적 시가 탄생한다. 카세트의 라벨, 백조와 흑조의 부리가 만나는 지점에는 오직 ‘연인(lover)’이라는 한 단어만 존재한다.
안드레아스 슐레겔 (작가)
작가 소개
Portrait of Gregor Hildebrandt, Photo: Guillaume Ziccarelli,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1974년 독일 바트 홈부르크에서 출생하여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는 카세트테이프와 바이닐을 주재료로 삼아, 이들을 콜라주하거나 조립하여 미니멀하면서도 낭만성을 지닌 회화, 조각, 설치 작업을 선보여왔다. 작가가 사용하는 아날로그 저장 매체의 광택 있는 표면 너머에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인 음악과 영화가 숨어있다.
그의 회화와 조각 작품 제목은 음악이나 영화와의 연관성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대중 문화 매체의 사용은 우리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을 모두 불러일으킨다. 또한, 작가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은 ‘떼어내기’ 기법은 캔버스에 붙인 양면 접착테이프에 자성 코팅을 문질러 복잡하고 찾기 어려운 가루 패턴을 추적하는 것으로, 기억의 과정을 은유한다.
건축적인 종합 예술 작품을 연상시키는 그레고어의 바이닐 조각 작품과 거대한 음향 장벽, 풀린 카세트테이프로 만든 커튼과 같은 설치 작품들은 감상자를 위한 길이 되며, 이를 통해 관람객은 그레고어의 작품 세계에 담긴 과거와 기억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게 된다.
ⓒ Perrotin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