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TOUR · GALLERY
ANIMA
LAURENT GRASSO
로랑 그라소
Perrotin Dosan Park
페로탕 서울은 로랑 그라소(Laurent Grasso)와의 두번째 개인전 ≪아니마(ANIMA)≫를 도산파크 갤러리에서 개최한다. 지난 2016년 페로탕 삼청의 개관전 이후 7년여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회화 연작, 조각 및 네온 작품과 더불어 작년 가을 파리에서 처음 공개된 <아니마(Anima)>(2022) 영상 작품으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한다. 회화와 영상, 그리고 조각을 통해 재현 혹은 의인화된 개념에 근거하지 않은 새로운 가설들로 채워진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본 전시를 여러 챕터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전한 서사로 인지한 작가는 과학적 발견이나 인문학 뿐 아니라 특정 현상이나 장소에 대한 믿음과 신화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 오버헤드 카메라 촬영과 다양한 기술 및 도구를 사용한다. 그의 작업에 있어 영상은 핵심 매체이며, 그렇기에 <아니마(Anima)>(2022)는 전시 구성의 중심이 된다.
환경사학자 그레고리 케네(Grégory Quenet)와 수년간의 협업 과정으로 제작된 이 영상은 예술과 과학적 연구 간 생산적 교류의 결실이자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발자취를 따른다.
Laurent Grasso Anima, 2022 film HR, 18’14’’ © Laurent Grasso /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히 프랑스의 쁠랜느 알자스(Plain of Alsace) 지역에 위치한 생뜨오딜르 산(Mont Sainte-Odile)의 신비한 대지 현상에 주목했다. 생뜨오딜르 산은 19세기 말부터 성 오딜을 기리는 영구적인 숭배가 행해져 온 순례지로,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묘사한 ‘임계 지역’에 대한 지구과학적 연구가 실행된 지점과 매우 가깝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우주-대지의 해류가 통과하는 지역으로 지구 생물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이단의 벽’으로 널리 알려진 돌로 된 요새는 산을 에워 싸며 숲 속으로 약 11킬로미터에 걸쳐 뻗어 있어 일종의 고고학적 호기심을 자아낸다.
Laurent Grasso Anima, 2022 film HR, 18’14’’ © Laurent Grasso /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지질학적, 신화적, 영적 힘의 융합에 흥미를 느낀 작가는 환경사학자 그레고리 케네와 함께 이 지역의 역사를 조사했다. 생뜨오딜르 산에서 촬영된 <아니마(Anima)>(2022)는 인간, 여우, 바위 등 다양한 대상들의 관점과 시각을 혼재하여 보여준다.
이에 더해 미동 없이 피어 오르는 불꽃, 유령 같은 구름, 그리고 ‘파이로폰’ (유리관 내부에서 발생하는 작은 폭발에 의해 음이 생성되는 19세기 악기)의 소리와 같은 신령스러운 요소들은 영상 속 현실과 꿈 사이를 부유하는 불가사의한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에 일조한다. 세심하게 연출된 카메라 움직임, LIDAR 스캐너로 만든 환상적이고 투명한 이미지, 영묘한 조명, 워렌 엘리스(Warren Ellis)의 난해한 배경 음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세상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신비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결국 인간의 시각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창조해 낸다. 이를 통해 나무, 동물 또는 바위가 미지의 형태, 즉 지성이라 일컬을 만한 그들만의 내면성을 가질 수 있음을 제시한다.
Installation View, Laurent Grasso, ANIMA, Perrotin Dosan Park(Seoul) May 4 – June 17, 2023 Courtesy the artist and Perrotin. Photography by ARTiPIO
<아니마(Anima)>(2022) 속 카메라에 의해 채택된 다양한 관점은 전시장 입구에 걸려 있는 청동과 네온으로 각기 제작된 <파놉테스(Panoptes)>(2022)의 나뭇가지 끝에 달린 여러 개의 눈들과도 상응한다. 이는 성 오딜이 펼쳐진 책 위로 자신의 눈을 들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눈은 작가가 이미 여러 프로젝트에서 추구해온 소재이다. 성 오딜이 시력을 회복한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수도원 내부에는 눈의 상징물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뭇가지에 눈을 두어 나무에 감성을 부여하고, 식물의 세계에 지성이라는 개념을 불어넣는다.
또한, 청동 조각의 물성을 빛을 방출하는 네온으로 변환하며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경계를 탐구한다. 광합성 과정에서 식물 속 흐름을 연상시키는 네온 작품 <파놉테스(Panoptes)>(2022)는 세상의 물질성 속에서 스스로를 확산하는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상당히 단순한 개념적 병치이다.
Laurent Grasso Panoptes, 2022 Black bronze, 90 x 105 x 15 cm Photo: Tanguy Beurdeley © Laurent Grasso /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파놉테스(Panoptes)>(2022) 옆 조각 <아니마(Anima)>(2023)는 여우를 품 에 안 고 있 는 어 린 소년을 형상화한 것으로, 동명의 영 상 <아니마(Anima)>(2022)와 호응한다. 영상 속 같은 동물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아이와 신성함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연작 중 하나이다.
메신저 혹은 신탁을 전하는 사제처럼 보이는 어린 소년은 뭔가 독특한 것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나 지식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보인다. 영상에 여러 번 등장하는 여우는 스크린을 통과해 조각으로 구현된 것처럼 보여져 영상 속 가상의 세계와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세계 사이에 묘한 기시감(déjà vu)을 유발한다.
Laurent Grasso Anima, 2023 Bronze, 130 x 44 x 30 cm Photo: Tanguy Beurdeley © Laurent Grasso /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전시장 1층에는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 오닉스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조각 <미네르바의 헬멧(The Helmet of Minerva)>(2023)을 중심으로, 작가가 2009년부터 시작한 연작 <과거에 대한 고찰(Studies into the Past)>의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인다.
Laurent Grasso The Helmet of Minerva, 2019 Onyx, LED, transformer, 60 x 46.4 x 9.3 cm © Laurent Grasso /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 방식과 영상 속 요소들을 통합한 이 방대한 개념적 프로젝트는 구름이나 불꽃과 같이 기이한 현상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화면을 뚫고 나와 회화 속 거대한 아치형 건축물이나 생뜨오딜르 산을 채우고 있는 듯하다. 유사-과학적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 속에서 충실하게 재현된 신화, 종교, 역사적 배경들은 이질적인 오브제 및 현상이 더해져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흐트러트린다.
작가는 시간을 예술적 소재로 삼아 서로 다른 시제를 혼합한 시간 여행이라는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실제로 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거짓된 기억’을 환기하기 위해 보존주의자들과 협력하여 오래된 듯한 회화작품을 제작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작품의 제작 장소와 시기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일종의 미래의 고고학이다.
Laurent Grasso Future Herbarium, 2022 Oil and palladium leaf on wood, 85.5 x 85.5 x 6.5 cm Photo: Andy H. Jung © Laurent Grasso /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마지막으로, 회화 연작 <미래의 식물표본실(Future Herbarium)>에서 묘사하는 데이지, 아네모네, 국화 등 여러 종의 꽃들은 가까운 미래에 잠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돌연변이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이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가상의 세계에서 꽃의 중심은 마치 그들의 DNA가 비정상적으로 변형된 것처럼 갈라진다. 작품 속 반투명한 물질성은 LIDAR 스캐너의 이미지를 상기한다. 이 스캐너는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아니마(Anima)>(2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과학적 도구를 통해 그 잠재성이 탐구되고 실재화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회화 연작 <미래의 식물표본실(Future Herbarium)> 은 <아니마(Anima)>(2022) 속 잠재된 에너지의 전개이자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꽃이 그려진 팔라듐 시트 표면에 변형적으로 반사되는 영상은 회화와 영상, 그리고 잠재적 세계 사이의 조응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영상 <아니마(Anima)>(2022)를 통해 관객은 현실과 꿈의 경계이자 미확인 세계의 가장자리와 마주한다. 초현실적이고 모호하지만 가능성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닌 그의 작업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직관적으로 한데 녹여내어 관객들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기존의 인식을 반문하게 한다.
Laurent Grasso Studies into the Past Oil on wood, 122 x 81 x 7 cm Photo: Claire Dorn © Laurent Grasso / ADAGP, Paris,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로랑 그라소는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파리의 국립 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 그리고 뉴욕의 쿠퍼 유니온(Cooper Union)을 졸업했다. 2015년 문화예술공로훈장 기사장을 수훈했고, 2008년 마르셀 뒤샹 상을 수상했다. 또한 로마에 위치한 프렌치 아카데미(메디치 빌라)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04-2005).
몰입형 설치와 환경을 만들어내는 그의 전시는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그랑 팔레(Grand Palais),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죄드폼 국립미술관(Musée du Jeu de Paume) 등 파리의 우수한 미술관에서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쿄의 모리 미술관(Mori Art Museum),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베이징의 레드브릭 미술관(Red Brick Art Museum),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 워싱턴의 허시혼 미술관 · 조각 정원(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그리고 마이매이의 바스 미술관(Bass Museum of Art) 등 해외 유수기관에서도 진행되었다. 아울러 작가는 시드니, 모스크바, 리옹, 광주, 부산 등 다수의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한편 리움미술관 파사드에 네온 작품 <Memories of the Future> (2010)를 설치했으며, 2021년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그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로랑 그라소의 작품을 주제로 다수의 주요 모노그래프(monograph)가 출판되었으며, 곧 Rizzoli에서도 출판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