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TOUR · GALLERY
Lygia Pape
Lygia Pape
리지아 파페
White Cube Seoul
화이트 큐브 서울은 한국 최초 개인전을 통해 브라질을 대표하는 예술가 리지아 파페(1927-2004) 의 작품세계를 조망한다. 구체미술 운동의 대표 주자이자 그로부터 파생된 신(新)구체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리지아 파페는 라틴아메리카 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이번 전시는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공간적 역학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형태의 기하학적 추상을 개척한 파페의 50여 년 예술 생애를 따라가며 드로잉,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대표작을 선보인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것의 발명을 추구한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처음 마주하는 언어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중략…] 내게 예술은 세계를 이해하는 […중략…], 세계를 알아가는 길이기에 나는 늘 새로운 발견을 갈망한다.”
– 리지아 파페(Lygia Pape) –
화이트 큐브 서울, 《Lygia Pape》(24.03.22.-05.25.),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1950년대 초반 리우데자네이루 현대미술관에서 수학 중이던 리지아 파페는 알루이지우 카르방(Aluíso Carvão), 리지아 클라크(Lygia Clark), 엘리우 오이티시카(Hélio Oiticica) 등과 함께 실험적인 예술가 집단 ‘그루포 프렌테(Groupo Frente)’에서 활동했다. 유럽 구체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그루포 프렌테는 구상미술에 치우쳐 있던 당대 브라질 모더니즘의 관습을 거부하고, 관찰된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기하학적 추상 미술을 추구했다.
이러한 경향성을 잘 보여주는 파페의 ‘Relevos’(‘부조’) 연작은 구성주의 형식에 대한 초기 실험의 좋은 예로, 기계로 만든 듯한 기술적 정밀함이 두드러진다. 섬유판에 템페라와 에나멜을 적용한 ‘Relevo’(1954-56)는 세 개의 피라미드형 조형물이 한 조를 이루고, 네 모서리에 각 조가 계획적으로 배열된 작품이다.
균일한 크기의 피라미드는 맞닿은 두 경사면이 형형한 오렌지와 검정으로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작가는 이 3차원의 물체를 목재 캔버스의 평면에 세움으로써 관람자를 지각의 패러독스에 빠뜨린다. 규칙적으로 정렬된 기하학적 형상이 평면으로 융합되면서 마치 공간에 독립적으로 떠 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화이트 큐브 서울, 《Lygia Pape》(24.03.22.-05.25.),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파페는 ‘Relevos’에서 사용했던 선형적인 요소와 실험적 배열을 계속 발전시켜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잉크 드로잉 연작 ‘Desenhos’(‘드로잉’)을 그렸다. 이 시기는 그루포 프렌테의 일원이었던 그가 이후 신(新)구체주의에 온전히 투신하는 시점까지의 전환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Desenhos’는 구체미술의 극단적 합리주의와 신(新)구체주의에 잠재된 풍부한 표현성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정밀한 선의 궤적은 충동적으로 그린 자국들과 교차하면서 역동성을 띠는 구형과 각진 형상을 만들어낸다. 무리 지어 형태를 이룬 선은 빠른 스케치의 즉흥성에 힘입어 서로 충돌하고, 이동하고, 엮이고, 부서지면서 화면이 움직이게 한다.
이런 역동은 옵아트의 착시 효과나 음률의 상승과 하강을 연상하게 한다. 평행선이 오선처럼 펼쳐지고, 여백은 소리에 쉼을 주어 흐름을 잡아주는 휴지(休止)로 기능한다.
화이트 큐브 서울, 《Lygia Pape》(24.03.22.-05.25.),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1959년 브라질 신(新)구체주의 운동에서 리지아 파페가 주역으로 활동함에 따라 그의 예술적 실천에도 변화가 왔는데, 즉 예술이 정적인 형상에서 해방되어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사물 간 상호작용을 통해 감각에 적극 호소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Livro Noite e Dia(밤과 낮의 책)'(1963-76)는 회화, 부조, 책 제작 기법을 결합한 조각이자 동시에 책이기도 한 작품 시리즈 중 하나다. 작가는 정사각 목판의 일부를 깎아 내 그 단편을 다시 원판에 붙이는 식으로 총 365개의 서로 다른 나무 조각을 만들고, 검정, 흰색, 회색의 무채색으로 칠한 뒤 이를 직각으로 배열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1년 동안 매일 이동하는 빛의 흐름을 기록함으로써 시간을 선형적으로 헤아릴 수 있게 했다.
화이트 큐브 서울, 《Lygia Pape》(24.03.22.-05.25.),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시네마 노보(Cinema Novo)의 일원으로서 영화 제작에도 열정을 보였던 리지아 파페는 ‘Livro Noite e Dia’를 영화를 편집하듯 분할하거나, 자르거나, 세부 단위로 재작업할 수 있게 구성했고, 그런 점에서 각 나무 조각은 마치 영화의 한 프레임과도 같다.
1960년대 초 신(新)구체주의 운동이 해체된 후, 파페는 원, 삼각형, 정사각형 등 기본 형태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 정사각형을 구조의 기초로 삼은 기하학적 조각 시리즈 중 하나인 ‘KV256’(1961-98)은 ‘Livro’ 연작에서도 볼 수 있었던 재조합이 가능한 구성요소에 대한 탐구가 이어진 결과물이다.
화이트 큐브 서울, 《Lygia Pape》(24.03.22.-05.25.),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고정되지 않은 크롬 도금 철제 부품으로 이루어진 ‘KV256’은 기하학적 요소를 재배열하여 정사각형에 기반한 형태를 만들 수도 해체할 수도 있게 한다. 분리가 자유로운 부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작품의 옆, 앞, 뒤 또는 위에 배치하는 등 무수히 많은 배열로 작품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처럼 금속의 유연한 조작을 허용함으로써, 공업적 구성의 무게감을 초월하고, 기하학적 추상성과 유기적 유동성을 동시에 구현한다. 빛을 반사하는 크롬 표면은 변화하는 빛과 상호작용하며, 입체와 허공, 물질과 형이상학이 교차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Lygia Pape, Volante, 1999,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작품 활동 후기에 접어들고부터 리지아 파페는 기하학적 형태 안팎의 틈새를 탐구하며 이성과 직관의 소통을 매개하는 데 전념했다. ‘운전대’ 또는 ‘비행’이라는 뜻의 ‘Volante’ 조각 연작에 속하는 1999년 작품에서 보이는 구리로 도금된 철제 바퀴는 정지와 움직임 사이에 놓인 듯 보인다.
작가는 이와 같은 경계적 차원을 ‘자성화된 공간(magnetised space)’이라 이름했고, 이를 통해 부피를 공간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개념적 틀을 정립했다. 그는 이 자성화된 공간을 ‘끝없는 실’로 연결된 것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개념이 도시 구조의 복합적인 상호연결성, 신체와 공간의 관계, 관람자와 작품의 관계 등에도 적용된다고 보았다.
Lygia Pape, Ttéia 1,B (Perspectiva), 2000,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파페가 그리는 자성화된 공간이 가장 잘 구현된 작품 ‘Ttéias’의 제목은 거미줄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teia’와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나 존재라는 뜻의 ‘teteia’를 활용한 언어유희적 표현이다. 1976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금속 실을 소재로 제작해온 이 연작 중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것은 ‘Ttéia 1,B’(2000)이다. 여러 가닥의 금속 실이 모여 부피를 가진 원통형 빛의 기둥을 이룬다.
엇갈린 형태로 배열된 기둥은 갤러리의 한쪽 코너를 가로지르며 서로 교차한다. 실의 표면에 닿은 빛이 반사되면서 ‘Ttéia’는 하나의 공간이자 빛의 영역을 형성하고, 이곳에서 움직임은 인간이 인지하는 현실의 기초 요소가 된다. 활동 전기를 대표하는 ‘Tecelares’ 판화와 ‘Desenhos’ 드로잉에서 두드러지는 기하학적 짜임의 구조가 연상되기도 하는 ‘Ttéia’ 연작은 리지아 파페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화이트 큐브 서울, 《Lygia Pape》(24.03.22.-05.25.),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리지아 파페가 2004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 중 하나인 ‘But I Fly'(2001)는 나비를 뜻하는 영어의 ’butterfly’를 시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감각적 경험의 중요성과 일상 속 역할을 강조하는 작가 특유의 숭고한 단순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상 속에 붉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하는 작가는 나른하게 물결치듯 부채를 움직여 관람자를 깊은 최면 상태로 이끈다.
검정, 아이보리, 빨강으로 구성된 미니멀한 색조를 사용하여 청각적 요소를 강조한 이 영상은 브라질에 서식하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담아 작가가 한평생 고향으로 여긴 온화한 기후의 공간으로 관람자를 안내한다. 이번 전시는 리지아 파페 서거 20주기를 맞이하여, 양감과 공간, 기하학적 추상의 해방과 조화로 인간의 지각과 공간성의 한계를 확장한 작가의 예술적 유산을 기념한다.
ⓒ White Cube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