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TOUR · GALLERY
diffusion
Joaquín Boz
호아킨 보스
Perrotin Seoul
‘When we look at the paintings, they mentally evoke another moment.
우리가 이 그림들을 볼 때, 우리 내면적으로 또 다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 Joaquín Boz –
Joaquín Boz Untitled, 2023, oil on wood panel 160 x 260 x 4.5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그림과 함께 여행하기
그림은 이동한다. 때로 그림은 손상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섬세하게 제작된 상자에 들어가 한 번에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따른다. 일단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림이 완성되고 나면, 그림은 여행에 나설 준비를 마친 셈이다. 작가가 작품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작품은 최종적 상태로 굳어진다.
그림은 표준화된 공정에 따라 이동한다. 컨디션 리포트, 세심한 포장지와 포장, 나무로 제작된 운송용 상자로 이동한 뒤에는 다시 한번 컨디션 리포트 작성과 함께 포장을 풀고, 벽에 걸고, 배송을 위해 다시 운송 상자에 들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의 대부분은 예술품 운송 전문가들이 담당한다. 소중한 작품을 원래의 순결한 상태로 지키기 위해, 온습도 역시 엄격히 관리된다. 그림은 이와 같은 집중적인 관리를 받으며 작가의 손을 떠난다. 이 과정은 추상과 구상화를 막론하고 거의 동일하다.
Joaquín Boz Untitled, 2023, oil on wood panel 130 x 190 x 4.2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호아킨 보스 역시 이동한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과 달리, 그는 스스로 이동하며 태초의 순결한 상태를 유지하지도 않는다. 보스는 작품 창작을 지속하는 동시에 다양한 목적지를 탐색하며 변화한다. 종종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지 삼거나 다른 도시에서 출발하기도 하며, 다른 예술가들과 다를 바 없이 일반적인 여객기를 탄다. 그러나 동료 예술가들과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보스는 자신의 그림보다 먼저 이동한다.
그의 그림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스튜디오나 다른 곳에 있는 미술품 수장고, 갤러리에서 출발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러한 경우, 작가는 자신의 작품보다 한 발짝 먼저 이동해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작품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가? 보스의 그림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그의 정신을 출발지 삼는다. 그는 손에 페인팅 나이프를 비롯한 익숙한 창작 도구와 함께 여행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는 몸이 기억하는 바를 구현해낸다. 그의 작품은 이를 통해 특정한 형태와 색상, 질감으로 구현되며, 이는 호아킨 보스가 영위하는 많은 여행과 이동을 통해 축적되고 진화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보스의 작품은 그가 도착한 뒤에 도달하며, 그를 통해 나타난다.
Exhibition view of Joaquin Boz’s ‘diffusion’ at Perrotin Samcheong, Seoul. Photographer : Hwang Jung woo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이처럼 호아킨 보스는 시간 안에서 이동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무엇이든 손쉽게 제작할 수 있는 오늘날의 환경에서는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창작 방식이다. 현재 우리는 한 번에 인식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것들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모든 것이 급속도로 망각의 늪에 빠지는 창조-소비의 사이클이 점점 가속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틀 아래 놓인 창조적 작업들은 표준화되어 우편 번호가 달린 주소라면 전 세계 어디든 쉽게 운송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어떤 작품은 알고리즘으로 미리 정해둔 요소를 조합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공유하는 시공간적 경험을 무시하는 탈시간적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호아킨 보스는 시공간을 점유한다. 서울에서의 전시를 위해, 그는 다시 한번 직접 이동하여 서울에 방문했다. 전시를 앞둔 몇 주간은 갤러리를 임시 작업실로 활용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추상적이고 불확정적인 형태 각각이 완성에 이르렀다고 느낄 때까지 시간을 소진하고 손을 타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 나갔다. 동시에 만들어진 이 그림들은 시간을 통해 축적된 경험의 진화를 이야기한다. 특정한 장소에서 창조되었지만, 장소특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 작가와 함께 이동했고, 지금도 함께 움직이고 있다.
Joaquín Boz Untitled, 2023, oil on wood panel 180 x 160 x 4.5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누군가는 보스의 작품에서 어느 정도의 반복을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주제를 되풀이한다는 의미에서의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가속하는 상황에서 작가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양태로서의 반복이다. 나무로 짠 그림 표면에서 마치 반복되는 듯 보이는 형태와, 모양, 기호, 색상, 심지어 질감에 어떤 패턴이 존재하는 걸까? 특정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가장 무작위한 현상에서도 패턴을 인지하는 자연 원칙에 의해 어떤 패턴을 발견하고 말지도 모른다 (옷감, 구름, 심지어 우유 거품에서 예수의 얼굴을 목격한, 수 없는 사례들을 생각해보라!).
‘스테이블 디퓨전’이나 ‘미드저니’와 같은 딥러닝 모델과 생성 AI가 보스의 초기 작업부터 ‘충분한’ 시각 데이터를 학습한다면, 인간의 눈에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어떤 패턴에 무작위성을 가미한 정교한 공식이 도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복잡한 계산의 결과물일지언정, 작가를 통해, 작가와 함께 시공간을 점유할 수는 없다. 보스의 작품을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에 입력한다면 패턴 인식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대신 ‘호아킨 보스 스타일로 생성한’ 반복된 패턴의 결과물인 어떤 이미지가 출력될 것이다.
현장에서의 쉽지 않은 창작 과정을 거쳐 전시에 이른 보스의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그의 그림은 인간이 패턴 인식이라는 본능에 자동적으로 끌려갈 때 두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않으려 애쓰는 노력을 촉구한다. 그의 그림은 전시 공간에서 소거된 것, 즉 작가가 현장에서 보낸 시간과 그가 자신의 그림과 함께 이동하는 지극히 수고로운 방식을 사유하도록 우리에게 말을 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시를 통해 보여지는 작품에 국한되어 있지만, 어쩌면 앞으로 쌓일 그의 작품들에는 명백하게 반복되는 패턴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대한 정량적이고 산술적인 접근은 우리가 손에 잡히지 않는 보스의 그림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작가가 스스로를 어떻게 유지해나가는지, 그가 자신의 그림과 함께 어떻게 여행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그림보다 앞서 목적지에 도착하는지, 또한 가장 무작위한 사건에서조차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재현이나 패턴을 찾으려는 우리의 본성에 어떻게 맞설 수 있는지.
호아킨 보스의 그림을 보며 깨닫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점들이다.’
– 박재용 –
Portrait of Joaquín Boz,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Photographer : Hwang Jung wook
호아킨 보스(1987년생, 아르헨티나)는 신체적 에너지, 깊은 숙고와 절제된 세련미에 기반하여 대지(earthy)의 색으로 추상화를 그려낸다.
나무 판넬 위에 유화 물감을 손으로 뿌리고, 긁고, 밀어내면서 다양한 질감과 제스처를 만들어내며 작가의 물리적 존재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그는 율동적이면서도 간결하며, 대담한 선형의 터치들을 유희적으로 병치하여 비구성적 화면을 만들어낸다. 물감을 칠하는 대신 닦아내기도 한다. 모든 회화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판단들을 담고 있으며, 그 재료와의 긴밀하고 신랄한 대화를 내포하는 흔적들 간의 유기적 관계가 드러난다. 가로 9미터, 세로 3미터의 대작부터 28센티와 33센티의 소품까지 다양한 크기의 작품을 그려내는 데에 익숙하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작업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화폭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잠재성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반(反)영웅적인 몸짓이다.
© Perrotin Seoul 제공